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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가 나를 사랑하기 시작한 순간들– 《리틀 미스 선샤인》, 《프란시스 하》와 함께

by Hary0 2025. 4. 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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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 질 녘 도시 거리에서 머스터드색 셔츠를 입은 젊은 여성이 미소 지으며 걷는 모습. 상단에는 '내가 나를 사랑하기 시작한 순간들이라는 한글 제목이 삽입되어 있다.
▲ 해 질 녘의 따스한 햇살 아래, 일상 속에서 자신의 존재를 긍정하며 걷는 한 여성의 모습. 불완전한 순간 속에서도 나를 사랑하게 되는 감정의 시작을 상징적으로 담아낸 이미지입니다.

1. 스스로를 외면하며 살아왔던 시간들

‘나를 사랑해야 한다’는 말은 이제 너무 익숙하다. 하지만 그 문장은 말처럼 쉽지 않다. 우리는 자라면서 끊임없이 타인의 기준에 맞춰 살아가는 방법을 배운다. 잘해야 사랑받고, 예쁘거나 멋져야 칭찬받으며, 실패하지 말아야 자격을 가진 존재가 된다고 믿는다. 그렇게 우리는 스스로에게 엄격해지고, 기준을 채우지 못하는 날엔 자신을 미워하는 데 더 익숙해진다.

내가 나를 사랑하지 못한 이유는 단지 자존감이 낮아서가 아니었다. ‘있는 그대로의 나’가 아니라 ‘누군가에게 인정받기 위한 나’만을 바라봤기 때문이었다. 그 눈으로 내 모습은 늘 모자랐다. 조금 더 예뻐져야 했고, 조금 더 성공해야 했으며, 타인의 기대를 채우지 못하면 스스로를 실패자처럼 느꼈다. 타인에게 좋은 사람으로 보이기 위해 애쓰고 있는 동안, 나는 나 자신을 볼 수 없었다.

하지만 어떤 계기들은 그 흐름을 멈추게 만든다. 더는 견디지 못하게 만드는 어떤 고통, 아주 작지만 반짝였던 순간들, 때론 우연히 만난 사람이나 영화 한 편이 마음을 건드린다. 그리고 비로소 깨닫게 된다. ‘지금 이 모습으로도 나는 나에게 괜찮은 사람일 수 있다’는 사실을. 그제서야 우리는 조금씩 나 자신에게 말을 걸기 시작한다. “지금도 괜찮아”, “그래도 잘했어”, “나는 그대로 괜찮은 사람이야.”라고.

2. 《리틀 미스 선샤인》 – 망가진 사람들 속에서 피어난 단단한 애정

《리틀 미스 선샤인》은 흔히 말하는 ‘정상 가족’의 조건을 갖추지 못한 이들의 여행을 그린다. 각기 다른 이유로 무너져 있는 가족들이 한 명의 소녀, 올리브의 미인대회 참가를 위해 무너진 차를 타고 함께 미국을 횡단한다. 이 여정에서 갈등도, 싸움도 끊이지 않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그 속에서 진짜 ‘자기다움’과 ‘연대의 온기’가 피어난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은 매우 상징적이다. 올리브는 자신의 모습에 어울리지 않는 무대에서 엉뚱하고 유쾌한 댄스를 선보인다. 관객들은 당혹스러워하고, 심사위원은 제지하려 하지만, 그녀의 가족은 무대 위로 함께 올라가 춤을 춘다. 그 장면은 단순한 해프닝이 아니다. ‘틀림’으로 평가받던 존재들이 스스로를 부정하지 않고 끝까지 그 자리를 지켜낸 순간이다.

올리브는 세상이 원하는 기준을 충족시키지 못한다. 그렇지만 그녀는 자신이 좋아하는 것, 하고 싶은 것을 선택한다. 그리고 그 옆에는 외모나 성공 여부와 상관없이 그녀를 응원하는 가족이 있다. 이 영화가 특별한 이유는, 실패하고 망가진 사람들 속에서 피어난 애정이 ‘사랑받을 자격’이라는 개념을 완전히 무너뜨리기 때문이다.

이 여정을 통해 가족 모두는 조금씩 바뀐다. 포기했던 꿈을 다시 떠올리고, 용서를 배우고, 무엇보다 서로에게 먼저 다가가려고 한다. 올리브 덕분에 그들은 자신을 미워하던 이유에서 벗어나기 시작한다. 나는 이런 순간들이야말로, ‘자기 자신을 사랑하는 일’의 시작이라고 믿는다. ‘이래도 괜찮다’고 말해주는 사람이 있다는 건, 내 안의 목소리가 처음으로 스스로에게 따뜻해지는 순간이다.

3. 《프란시스 하》 – 모든 게 불완전해도, 지금의 나로 춤추기

《프란시스 하》의 주인공 프란시스는 무용수가 되고 싶지만 현실은 그녀의 뜻대로 흘러가지 않는다. 집세는 밀리고, 친구는 점점 멀어지고, 직업도 안정적이지 않다. 그러나 프란시스는 그런 삶을 조롱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녀는 계속해서 시도하고, 넘어지고, 다시 일어난다. 중요한 건 그 과정에서 그녀가 자신을 점점 더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게 된다는 점이다.

영화는 흑백으로 촬영되었지만, 그 안의 감정은 매우 풍부하다. 프란시스가 길거리에서 혼자 춤추는 장면은 이 영화의 상징이다. 그녀는 누구의 시선을 의식하지 않고, 제대로 되지 않는 삶 속에서 그 순간만큼은 온전히 자신으로 존재한다. 그 춤은 성공이나 완벽함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 ‘지금 내가 느끼는 감정’에 충실한 몸짓이다. 그 자유로운 리듬 속에서 프란시스는 자신이 얼마나 살아있고, 괜찮은 사람인지를 증명한다.

영화의 후반부, 프란시스는 친구들과도 어색해지고, 꿈이 멀어진 듯한 현실에 고립된다. 하지만 그녀는 완전히 무너지지 않는다. 그녀는 조금씩 나아가고, 혼자서도 생활을 이어간다. 누군가와의 비교가 아닌, 자신의 보폭으로 걷기 시작한 것이다. 그리고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서 그녀는 당당하게 자신의 이름을 말하며 자리를 잡는다. 그 장면은 마치 스스로에게 전하는 선언처럼 보인다. “지금 이 삶, 이 모습으로도 나는 괜찮아.”

프란시스는 완벽하지 않다. 하지만 그 불완전함을 부끄러워하지 않는다. 이 영화는 말한다. ‘자기 자신을 사랑하는 일’은 삶이 다 정리된 후에 찾아오는 게 아니라, 혼란스러운 지금 이 순간에도 가능하다고. 나의 혼란, 모자람, 시행착오마저 포함해서 나를 온전히 안아주는 그 순간부터, 우리는 비로소 나를 사랑하기 시작하는 것이다.

4. 사랑이 아닌 '수락'에서 시작된 사랑

자기애라는 단어는 때로 오해받는다. 과하게 자신을 드러내는 것, 나르시시즘과 혼동되기도 한다. 하지만 ‘나를 사랑하는 일’은 결코 거창하거나 눈에 띄는 게 아니다. 그것은 어쩌면 내가 나에게 하는 가장 조용한 수락일지도 모른다. “괜찮아. 지금 이 모습 그대로 살아도 돼.”라는 내면의 목소리. 그 말 한마디가 마음에 자리를 틀고 나면, 우리는 점점 스스로에게 관대해지고, 실수에 덜 두려워지고, 타인의 시선에 무너지지 않는다.

그 수락은 어떤 특정한 성취 이후에야 얻을 수 있는 게 아니다. 오히려 아무것도 증명하지 못했을 때, 상처 입은 채 방 한가운데 서 있을 때, 울음을 꾹 참으며 문을 나설 때 비로소 스스로에게 허락되는 감정이다. ‘이 상태로도 사랑받아도 되는 나’라는 믿음은 그렇게 아주 천천히 자란다.

우리는 모두 불완전하고, 때로 미워할 만한 모습을 가지고 있지만, 그 모습 그대로 괜찮다는 말을 듣고 싶다. 그 말을 가장 먼저 나 자신이 나에게 해줄 수 있다면, 삶은 훨씬 가볍고 단단해진다. 나는 지금도 부족하고, 여전히 흔들리고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를 사랑하기로 결정하는 것. 그것이 내가 나를 사랑하기 시작한 첫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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