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끔은 이유 없는 무기력이 나를 통째로 집어삼킬 때가 있다. 아무 일도 하지 않았는데 하루가 고단하고, 몸을 움직이는 것조차 벅차며, 모든 일이 내 일이 아닌 것처럼 멀게 느껴지는 날. ‘괜찮냐’는 누군가의 말조차 귀찮게 느껴질 만큼 마음은 축 처져 있다. 무기력은 외롭고, 무력하며, 때로는 나를 자책하게 만든다. 하지만 그런 날, 말보다 먼저 다가와 조용히 마음을 어루만지는 것이 있다. 바로 한 편의 영화. 오늘은 그렇게 아무것도 하기 싫은, 너무 무기력한 날에 꺼내보면 좋은 영화 5편을 소개한다. 이 영화들은 해결책을 말하진 않지만, 무기력한 나를 있는 그대로 인정해주고 다정하게 안아주는 작품들이다.
1. 패터슨 (Paterson, 2016)
짐 자무쉬 감독의 ‘패터슨’은 지루할 만큼 느리고 조용한 영화다. 주인공은 뉴저지의 소도시 ‘패터슨’에 사는 버스 운전사이며, 그 역시 이름이 ‘패터슨’이다. 매일 아침 같은 시간에 일어나, 같은 경로를 운전하고, 같은 벤치에 앉아 점심을 먹고, 퇴근 후에는 같은 바에 들른다. 그의 일상에는 특별한 사건이 없다. 하지만 그는 그 속에서 작은 기쁨과 감정을 포착해 시로 적는다. 시를 쓰는 동안 그는 자신의 내면과 조우하고, 그 시간은 단조로운 삶에 아주 잔잔한 파문을 일으킨다.
무기력한 날, 이 영화를 보면 아무 일도 하지 않는 내 하루가 꼭 실패한 것만은 아니라는 안도감을 느끼게 된다. 똑같은 하루가 반복되는 것 같아도, 그 안에 분명 나만의 리듬과 의미가 있다는 걸 ‘패터슨’은 조용히 일러준다. 지금 내가 조용히 숨 쉬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삶은 충분히 흐르고 있는 것이라고.
2. 퍼스트 카우 (First Cow, 2019)
켈리 라이카트 감독의 이 영화는 미국 서부 개척 시대를 배경으로 하면서도, 느릿하고 차분한 호흡으로 극의 전개를 이끌어간다. 요리사 쿠키와 중국인 이민자 킹 루는 숲 속에서 조우한 후 우정을 쌓고, 어느 날 한 부유한 농장의 젖소가 몰래 짜낸 우유로 도넛을 만들어 판다. 이 영화는 성공이나 거대한 목적보다 ‘함께 만든 따뜻한 것 하나’가 얼마나 소중한지, ‘작고 조용한 기회’가 삶을 얼마나 윤택하게 하는지를 보여준다.
무기력한 날, 우리는 흔히 삶이 아무것도 생산하지 못하고 있다는 생각에 빠진다. 하지만 쿠키와 킹 루처럼 아주 사소한 것으로도 생은 이어진다. 조용히 나를 위한 도넛을 하나 구워보는 것, 작은 아이디어에 마음을 실어보는 것, 그 자체로 우리는 여전히 삶을 살아가는 중이다. ‘퍼스트 카우’는 무기력 속에서도 조용히 타인을 향한 온기를 품을 수 있다는 걸 보여준다.
3. 노바디 노우스 (Nobody Knows, 2004)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이 작품은 말 그대로 ‘아무도 모르는’ 아이들의 이야기다. 네 남매는 어른 없이, 좁은 아파트에 갇힌 채 살아간다. 엄마는 돌아오지 않고, 아이들은 점점 세상과 단절된다. 하지만 이 영화는 아이들의 삶을 자극적으로 묘사하지 않는다. 슬픔도 고통도, 너무나 조용하게 흐른다. 심지어 영화의 결말조차 설명 없이 지나간다.
이런 서사가 무기력한 날의 감정과 이상하게 닮아 있다. 설명할 수 없는 감정, 이유 없는 침묵, 고요한 붕괴. ‘노바디 노우스’는 그저 그 감정을 ‘존재하게’ 만든다. 누군가에게는 아무 일도 아닌 하루가, 누군가에게는 전부일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지금 내가 침묵 속에서 보내는 이 하루도, 결코 의미 없는 시간이 아니라는 메시지를 전한다.
4. 플로리다 프로젝트 (The Florida Project, 2017)
찬란한 색감의 화면, 천진난만한 아이들, 장난기 가득한 하루들. 겉으로 보기엔 동화 같지만, ‘플로리다 프로젝트’는 미국 사회의 가장 낮은 곳에 살아가는 사람들의 이야기다. 디즈니월드 옆의 낡은 모텔, 그곳에서 살아가는 한 엄마와 딸. 아무런 희망도 미래도 없는 현실이지만, 아이들의 시선은 여전히 세상을 향해 열려 있다.
이 영화는 무기력함 속에서도 웃음을 잃지 않으려는 사람들의 이야기다. 현실은 막막하지만, 작은 색연필 한 자루, 종이컵 아이스크림 하나에도 기쁨을 느끼는 모습은 우리에게 묻는다. 정말 우리는 무기력한 걸까? 아니면 세상이 강요하는 기준에 너무 오래 맞추려다 지쳐버린 건 아닐까? ‘플로리다 프로젝트’는 조용한 시선으로 그 사실을 일깨운다. 지금 나의 하루가 실패가 아니라, ‘지나고 있는 과정’임을 말이다.
5. 세 번째 살인 (The Third Murder, 2017)
또다시 고레에다 감독의 영화다. ‘세 번째 살인’은 법정 드라마처럼 시작되지만, 어느 순간부터 진실보다 질문이 더 중요해진다. 피고인이 말하는 진실은 매번 달라지고, 변호사는 혼란에 빠진다. 하지만 이 영화는 끝내 답을 제시하지 않는다. 관객은 찜찜함을 안고 극장을 나선다. 그 찜찜함이 오히려 이 영화의 진짜 힘이다.
무기력한 날은 꼭 ‘답이 없는 하루’와도 같다. 뭘 해도 만족스럽지 않고, 스스로를 탓하게 되고, 아무것도 아닌 일에 민감해진다. ‘세 번째 살인’은 그 날의 감정을 대신 살아준다. 명확하지 않아도 괜찮다고, 꼭 결론을 내지 않아도 된다고. 우리는 여전히 질문하는 존재로 살아갈 수 있고, 그것이 삶이라는 긴 호흡 속에 존재하는 방식일 수 있다고.
무기력한 날을 ‘무조건 이겨내야 할 대상’처럼 느끼기보다, 그냥 곁에 두고 바라보는 시간도 필요하다. 오늘 내가 아무것도 하지 못했더라도, 지금 이 순간 그 감정을 느끼고 있는 것만으로도 이미 충분하다. 이 다섯 편의 영화는 무기력함에 빠진 우리에게 ‘무엇을 해야 하느냐’가 아니라 ‘그 감정을 그대로 두어도 괜찮다’고 말해주는 따뜻한 작품들이다.